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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일그러진... ‘辛가’

for piano and 4-channel electronics, 2022 / 14 min

Pf. 김준한 Elec. 이한

최초 아이디어는 조성진의 쇼팽 프렐류드 연주로부터 출발한다. 그는 마지막 24번 프렐류드의 D음 종지를 주먹으로 강하게 내려치며 끝을 내는데, 망치질(hammering) 같기도 한 이 모습이 내 뇌리에 굉장히 강렬하게 박혀 다양한 음악적 상상을 하도록 만들었다.
‘피아노’와 ‘망치질’이라는 두 가지 단어의 결합은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29번(흔히 “함머클라비어(Hammerklavier) 소나타” 라고 불리는 것)을 떠오르게 했다. 이는 내가 처 음 들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나에게 수많은 놀라움을 주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나는 이러한 놀라움들을, 원곡에 대한 재해석을 통해 찬미하고자 하였다.

이 곡에는 몇 가지의 설계된 구조가 중첩·병합이 되어있는데, 이를 간략하게 이야기하면 다음과 같다.

1. 전체적인 모토는 ‘형식적 일그러짐’에 대한 탐구이다. 이를 위해 “함머클라비어 소나타” 속에서 ‘형식적 일그러짐’이 발생된 경우들을 분석 및 분류하였다. 또한 이것을 기반으로, 앞서 말한 방식들에 대한 안티테제 역시 수립할 수 있었다. ‘형식적 일그러짐’이 발생하는 경우에 대한 분류는 아래와 같다.
ⓐ 화성적 흐름을 위한 프로세스가 지나치게 축소되거나 생략되었을 때
ⓑ 단위 시간 당 정보의 양이 달라졌을 때
ⓒ 음역의 갑작스러운 변화
ⓓ 셈여림의 갑작스러운 변화
ⓔ 음악적으로 성격이 다른 패시지가 짧게 삽입되었을 때
ⓕ 템포 또는 리듬이 인지 가능한 범위 내에서 달라졌을 때
ⓖ 기존의 흐름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강한 공격성을 가진 요소가 등장할 때
ⓗ 소리의 물리적인 밀집 정도가 바뀔 때
ⓘ 패시지의 묶음 단위가 지나치게 작아졌을 때
이러한 분류 속의 개별 항목들은, 곡의 전체적인 진행에 있어 완급조절을 하기 위한 구조를 형성하게 된다.

2. 전자음향은 곡의 전반적인 형식을 형성하는 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전자음향의 거시적인 흐름은
Ping-pong Delay → Flanger (+ Chorus) → Filter → Karplus-strong → Spectral Delay (via FFT) → Ping-pong Delay
의 순서로서, 첫 시작점으로 다시 돌아오는 형태를 띤다. 만약 이 흐름을 각각 따로 뜯어 음향적 효과만을 본다면 극도로 낮은 일관성을 갖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흐름은 딜레이(Delay)를 이용한 것이라는 점에서 강력한 일관성을 갖는다. 이러한 감각과 이성의 강한 모순 역시 ‘형식적 일그러짐’ 이라는 모토를 달성하기 위해 설계된 구조이다.

3. 피아노 건반 상에 존재하는 8개의 B♭은 느슨한 구조를 형성한다. 양 끝의 제일 높고 낮은 2개의 B♭을 제외한 나머지 6개의 B♭을 통해 6개의 조직을 만드는데, 이 과정에서 각 조직에는 여러 개의 “함머클라비어 소나타”의 파편들이 종속된다. (종속의 기준은 파편 속에서 중점적으로 등장하는 B♭의 위치가 된다) 곡의 진행도에 따라 각 B♭ 조직의 등장 가중치가 정해진다. 이는 매우 느슨하게 지켜지는 구조이다.

제목은 위의 항목 중 2번을 통해 정해진 것이다. 고전적인 푸가(Fugue)처럼 딜레이를 이용하지만, 정작 고전적 방식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방법으로 일그러져 푸가의 형태는 아 니게 되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