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적 전체주의(?)의 시대
지금은 거의 다 사라졌지만, 약 15년 전쯤만 해도 동네마다 비디오 대여점이 있었다.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동네 비디오점을 자주 갔던 나는 거기서 여러가지 애니메이션과 영화를 빌려서 봤던 기억이 있다. 비디오를 빌리기 위한 과정은 꽤나 길었다. 일단 몇 백원 정도의 동전을 준비해야 했고, 대여점의 비디오 꽂이들을 직접 손으로 밀어가며 골라야 했으며, 높은 곳에 있는 것들은 직접 발 받침대에 올라가거나 주인 아저씨께 부탁드려야 했다. 심지어 재고가 없으면 예약을 걸어놓기도 했었다. 그렇게 해서 빌리는 데 성공한 비디오는 몇 번이고 계속 봤던 추억이 있다.
그런데 시대가 많이 변했다. 디지털 시대가 열리면서 위의 모든 과정들이 필요가 없어졌다. 그저 클릭 몇 번이면 원하는 것을 골라서 볼 수 있고, 조금 보다가 마음에 안 들면 쉽게 꺼버리기까지 한다. 게다가 자신이 무엇을 볼 지에 대한 결정을 디지털 알고리즘에 넘겨버리기까지 한다.
이러한 변화는 감상을 넘어 창작 분야에도 적용되고 있다. 음악을 예시로 들자면, 단순히 DAW에 올려놓기만 해도 ‘들을 만한’ 것들을 만들 수 있게 해주는 서비스(이른바 ‘샘플팩’)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과거의 비트메이커들이 했던 ‘샘플링’은 레코드를 직접 고르고/구간을 찾아 자르고, 붙이고/변형시키는 방식이었다면, 디지털 시대에는 그 의미가 상당히 많이 바뀌게 된 것이다.
(물론 이에는 저작권 등 다양한 이슈가 엮여있지만, 그에 대해서는 넘어가도록 하겠다)
나에겐 이러한 변화가 꽤나 두렵고 슬프게 느껴진다. 점점 사람들이 진짜 자신의 취향을 잃어가는 것 같기 때문이다. 요즈음의 경향을 보면 편리하다는 이유로 스스로의 판단을 디지털에 넘겨버리는 경우가 점차 늘어나고 있다. 더 정확히는, 판단에 영향을 끼치는 매개변수가 정말 많이 줄어들고 있다. 아날로그적 개인을 통한 생각의 비중은 점점 줄어들게 되고, 디지털 알고리즘을 통한 추천을 본인의 취향이라고 믿게 되는 게 아닌가 싶다. 그러면서 그만큼 생각을 덜 하고 머리를 덜 쓰는 경향이 강해진다. 알고리즘의 분석과 추천이 비슷한 경우, 그 영향을 받은 사람들의 취향 역시 점점 비슷해져 간다. 취향의 다양성이 계속 줄어드는 것이다.
만약, 알고리즘이 결국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은 콘텐츠를 추천해준다면, 그때는 이른바 감각적 전체주의(?)의 시대에 도달하게 되는 게 아닐까. (사실 나는 거의 다 온게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필연적인 변화라고는 생각한다. 디지털화와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변화가 빨라지고, 콘텐츠의 휘발성이 높아진 시대에서 그때그때 쉽고 빠르게 고를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한 장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를 잘 노려 많은 부를 거머쥐는 능력자들도 분명 존재한다. (난 그 사람들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존경스럽다!)
하지만 나는 한 명의 작가 개인으로서 이러한 경향에 최대한 휩쓸리지 않으려 한다. 나에게 디지털과 AI는 그저 도구이길 바란다. 아직까지 나라는 개인에게는 너무나도 훌륭한 ‘판단의 아날로그적 매개변수들’(공간지각력, 질감, 냄새, 색감 등)이 있다. 이것들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창작자로서 스스로 많은 부분을 도려내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언젠가는 이런 요소들도 모두 디지털로 대체되리라 생각은 하고 있다만… 아무튼 이러한 감각적 전체주의에 마지막까지 저항하는 것이야말로, 작가로서 가져야 할 태도가 아닐까 싶다.
